“바퀴 달린 값싼 전자제품이라는 비아냥을 듣던 현대차가 10년만에 전세계를 놀라게 할 자동차를 만드는 메이커가 되었다”
- Top Gear UK
모빌리티 회사에서 일 할 준비를 하면서,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꾸던 어린 시절의 열정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있다. 진짜로,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자동차 디자이너가 장래희망으로 기록되어 있다. 건축학과를 지망해서 ‘자율전공’으로 들어간 대학교에서는 건축학과 대신 ‘자동차기술융합디자인’ 학과라는 신생 융합 학과를 선택하게 되었으나 IT 스타트업 업계에 들어오면서 잠시 멀어졌었는데, 이번에 다시 자동차와 모빌리티에 깊게 빠질 기회가 생겼다.
전세계 자동차 브랜드와 자동차 문화, 모빌리티 서비스 등에 대해 조사하고 알아보던 내 가슴을 설레게 한 것은 현대에서 2022년 공개한 N Vision 74 콘셉트카에 대한 소식이었다. 수소-전기 하이브리드로서 2026년에 200대 한정으로 양산할 계획이라고. 5년 전까지만 해도 북미와 유럽에서 마케팅 비용을 쏟아부으며 값싼 차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분투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어떻게 현대는 오늘날 800마력을 내는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의 수퍼카를 양산하는 회사가 되었나? 도대체 리더가 누구길래?
‘창업가’로서 회사의 결정들을 직접 해 본 뒤로, 높은 직책에 있는 기업가들에 대한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 솔직히 지금보다 더 와일드하던 대학교 학부생 때에는 그들을 논쟁해서 이겨내야 할 기성 세대 어른들로 여겼다. 요즘은 성과를 내는 기업인들을 보면 얼마나 솔선수범해서 많은 시간 일하고 똑똑한 결정들을 해야 했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사람들이 한국을 봤을 때 신기하게 여기는 점이 경제가 급성장을 겪으며 재벌들을 중심으로 재계가 돌아간다는 점이다. ‘재벌’이라는 단어도 ‘학원’처럼 고유명사로 쓰이고 있다고. 한국전쟁 이후 미군의 원조를 받아 설탕, 밀가루, 면 방직 공업을 하던 때 기업을 세운 세대를 1세대로서, 2020년대 현재 한국의 재벌은 3세가 최고경영자에 오른 3세 경영 시대를 겪고 있다. 개인적으로 제일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3세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임.
현대의 1대 창업자 정주영 회장이 ‘될 놈’이라고 좋아했던 손자가 정의선 회장이라고 한다. 잠깐 상상해 봤는데, 매일 아침 5시 30분에 함께 아침식사를 하는 집에서 살았다면 상당히 빡셌을 것 같다. 할아버지가 나라에서 제일 큰 회사를 세운 기업가이고,,, 매일 아침 함께 식사를 하면서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다면 아침마다 긴장감으로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내가 그에 대해 흥미롭게 봤던 점들은 아래와 같다:
정의선 회장은 전형적인 후계자 코스를 밟아온 사람.
제네시스 브랜드 출범을 아버지인 정몽구 전 현대차 회장에게 설득함.
PYL 프로젝트등 회장 취임 이전에 실패한 프로젝트도 꽤 있음.
동년배인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처럼 ‘검소하고 조용’하다는 평가를 받음. 엄청난 호감상인듯
피터 슈라이어, 알버트 비어만, 루크 동커볼케 등 글로벌 인재를 적극적으로 기용.
하드웨어 인력과 소프트웨어 인력 간의 대립을 겪고 있음.
후계자 코스
1999년 현대모비스(당시 현대정공)의 구매담당 이사로 입사, 2005년 기아자동차 사장, 2009년 현대자동차 부회장, 2018년 현대차그룹 수석 부회장, 2020년 아버지 정몽구 회장의 대를 이어 현대차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미션으로 미래 모빌리티 혁신, 글로벌 전략 강화, 신사업 발굴을 가지고 있다.
위에는 그룹 수석 부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촬영한 영상인데 상당히 친근하고 귀여우시다.
제네시스와 정의선
2013년 현대차그룹 내부에서 독립 고급차 브랜드 출범을 아버지에게 적극적으로 설득한 게 정의선 회장이라고 한다. 정몽구 회장은 처음엔 강하게 반대했다고. 정의선 회장이 2008년 현대차 브랜드 아래에서 출시한 제네시스를 독립시켰다. 제네시스가 없었다면 현대차는 지금의 위상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라 나는 탁월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10년 전 벤츠 C,E클래스로 대표되던 ‘강남 쏘나타/그랜저’ 시장을 제네시스가 다 먹었으니..
현대 가문과 현대차 내부 조직문화 모두 상명하복의 빡센 문화라고 알고 있는데,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이란 점에서 기대가 된다.
글로벌 인재의 기용
2000년대 후반부터 K5, K7시리즈를 디자인한 피터 슈라이어를 폭스바겐에서 영입해온 것을 시작으로, 벤틀리의 디자이너 루크 동커볼케(현재 현대차그룹 CCO)와 BMW M 디비전을 이끌던 알버트 비어만을 영입하는 등 해외에서 고위 임원급 인재를 대폭 기용해 와서 눈길을 끌었다. 현대차를 글로벌 회사로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듯.
여전히 여성 임직원 비율이 10% 정도이고, 외국인의 숫자는 더 많이 적으며, 수직적인 군대문화를 가진 회사로 유명한 현대차를 글로벌 체질로 개선하는 작업을 어떻게 빠르게 잘 했는지가 궁금하다. 앞으로 회사 내 임직원 다국적화를 어떻게 풀어갈지도 기대가 됨.
하드웨어 인재와 소프트웨어 인재
전기차로 전환되어가는 글로벌 흐름에 빠르게 적응한 현대자동차그룹이지만 여전히 회사 내에 기계공학과 출신으로 대표되는 하드웨어 인재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대표되는 소프트웨어 인재가 대립 중인 것으로 보여진다. 앞으로는 SDV(Software Defined Vehicle)의 시대가 올 것이 명확한데, 이 전환 시기에 회사 내 인력들을 잘 중재하는 것이 정의선 회장의 중요한 과제일듯.
최근에는 기존 소프트웨어 조직을 통합하여 AVP(Advanced Vehicle Platform 인듯) 본부를 신설하고 판교에 1500명 규모 신사옥을 지어 이들을 통합할 예정이라고 한다(기사). 까다로운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판교 밑으로는 안 내려가려고 해서 그렇다고. 경기도 화성의 남양연구소를 기반으로 한 하드웨어 연구 인력들이 엄청 질투할 것 같다 ㅋㅋ.
내가 생각해볼 점
한국의 모빌리티 업계 근로자가 될 입장에서.. 1) 빡센 공대 문화에 적응해야 할 것이고, 2) 영어 많이 쓰면서 글로벌한 사람 되는게 경쟁력 갖추는 데 큰 도움 될 것 같다. 또 3) 현대차를 포함해 모빌리티에서 혁신을 만드는 완성차 회사들이 어떤 신사업을 추진하는지는 계속 살펴봐야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