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스타트업 네트워킹 파티에 다녀왔다. 거기에서 ‘E’를 만났는데, 원래 얼굴만 알고 직접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는 사이였다. 이날 행사를 위해 급하게 만든 명함을 드리며,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뭘 하려 하는지 간단하게 설명했고, 그의 날카로운 질문과 나의 모호한 답변이 있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뜻밖의 조언을 해줬다:
지금 종한님이 하시려는 게 종한님의 바이브랑 잘 맞는 것 같아요. 너무 성급하게 대중을 설득시키는 제품을 만드려고 하지 말고, 종한님과 바이브가 비슷한 사람들이랑 잘 쓸 수 있는 걸 만드는 데에 집중해도 좋을 것 같아요.
바이브
바이브. 대체 바이브가 뭘까? 코딩도 바이브로 하는 시대인데. 내 머릿속에 깊게 박힌 ’바이브‘의 이미지는 유빈이가 대형 TV로 코딩을 하는 장면이다.
스스로를 인문학과 공학을 연결하는 자라고 칭하는 사람, 대장간의 65인치 TV에 컴퓨터를 연결해서 일하는 사람, 맥 바탕화면을 일주일마다 바꾸고, 세로토닌 나오는 배경음악을 틀어놓는 사람, 김유빈. 이 사람은 혈당 스파이크를 매우 경계하고, 금요일 저녁마다 미술 전시를 보러 가는 자기만의 리추얼이 있다.
지난 주에도 3일 정도 대장간에 놀러와서 ‘vibe work’를 했는데, 이때 무언가를 발견했다. 얘는 화면을 분할해서 한쪽에는 늘 메모장을 띄워 놓고 일을 한다. 호기심을 좇으며, 읽고 배운 것을 기록하고, 통섭(지식들을 연결)하고, 정리한다.
내가 정의하는 바이브란, 분주하거나 산만하지 않고, 하나의 흐름(flow) 안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되, 그 에너지 자체가 전염성이 높아 다른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상태이다.
퀄리티와 리듬
미디어를 잘 활용하는 선배 창업가들에게 영감을 받아 시작한 브이로그 2편을 올렸다. 사용할 영상을 고르고 편집하는 데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1편을 편집할 때는 아이클라우드에 올라가 있는 영상들을 다운받는 데에 시간을 많이 낭비해서 이번엔 영상을 미리미리 맥북으로 옮겨 두었는데, 이번에는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그건 바로,
“퀄리티에 대한 욕심” 이었다. 사실 나는 어릴 때 커서 예술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집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걸 정말 즐겼다.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PC와 함께라면 뭐든 만들 수 있었고, 나름 나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10년 전에 가라지밴드로 만든 음악) 이번에는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구도로 찍은 영상 소스가 있어 영상에 슬로우도 걸고, 재생 속도도 조정하며 실험들을 해봤다. 브이로그를 시작하면서 2주에 한번씩 짧은 2분짜리 영상을 올려야겠다 마음 먹은 것도 시간을 덜 쓰면서 지속성을 가져가기 위함이었다.
고화질의 소스를 재생 속도에 변화를 주며 음악, 음성과 타이밍을 맞춰 편집하려니 캡컷(틱톡을 만든 Bytedance에서 개발한 간편한 영상편집 소프트웨어)이 아니라 예전에 쓰던 프리미어 프로가 필요해졌다. 어도비 프리미어 프로로 넘어와서 영상 클립 하나마다 색상 설정을 다시 하고 음향을 조절하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나는 브이로그를 회고하듯 만들 계획이었다. 2주에 한 번씩 업로드하는 목표에 따라, 2주간 찍은 영상을 가지고 마지막 주의 주말에 주제를 추출하고 편집하여 올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욕심을 낸 후 하루에 한두 시간씩 1주 넘게 만지게 되면서 그 리듬이 깨져서 무슨 애자일 스프린트마냥 2주동안 찍고, 2주 가까이 편집하면서 또 영상 찍고, 그 때 찍은 영상을 또 2주동안 편집하면서 찍는 리듬이 되어버렸다. 아쉽게도 나는 분신술을 쓸 수 없기에 다시 원래 하던 리듬을 찾아야겠다.
앞으로 콘텐츠를 잘 만드는 걸 경쟁력으로 가지고 나가려 하는 사람으로서, 콘텐츠의 퀄리티는 중요하다. 그러나 3개월 뒤, 6개월 뒤의 콘텐츠 퀄리티를 향상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다음 편에 시간을 쏟느라 그 다음 편을 못 만들게 되는건 좋지 않다. ‘향상’을 위한 리듬과 최적의 퀄리티를 찾아야 한다.
Craftmanship
한편, 지난주에 문학 작품을 쓰시는 G님을 건대 카페에서 만나 3시간을 쉬지 않고 떠들었다. AI와 콘텐츠, 기업가 정신과 좋은 사회가 주요 대화 주제였다. G님은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다:
사람들이 생성 AI로 무언가를 만드는 걸 많이 할수록, 실제 물성이 있는 제품을 만드는 능력이 퇴화할 것 같아요.
오.. 깊은 통찰! 나는 이번에 캡컷(AI가 붙은 영상 편집 앱)이 아닌 레거시 영상 편집 툴을 사용해 많은 시간을 소모하면서 느낀 게 좀 있다. 영상 클립을 자르고, 색상을 맞추고, 음향 볼륨을 손으로 하나하나 맞추는 과정의 즐거움을 느꼈다. 코딩은 cursor에서 claude와 함께 코딩을 하는데, 이때는 개발자보다는 프로덕트 매니저가 되어 기능의 목표를 설명하는 데 초점을 둔다. 딸깍 하면 펑 하고 나오고, 수정을 지시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G님의 말을 듣고, 영상 편집에서의 미묘한 수동 작업의 차이를 느끼면서, 그래도 디자인 정도는 수동으로 수정하려고 하고 있다. 내가 만든 제품에서 사람들이 물성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불편한 디자인’을 한다. 미끄러지는 듯 스무스한 게 아니라 까끌까끌한 UI, 모든 게 자동화되어 흘러가는 UX flow가 아니라 중간에 조금씩 생각하게 만드는 human-in-the loop을 설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CFP
내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소개 웹사이트를 만들어 디자인하고 배포했다. 까끌까끌한 디자인을 적용했다. ‘까끌까끌한 디자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느끼고 싶으면 Y Combinator를 만든 폴 그레이엄의 블로그에 들어가보면 된다.
이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지금 시점에 기술 경쟁력(우리 회사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앱을 제일 빠르게 잘 만들 수 있어요!)이 중심이 되는 비즈니스를 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사람들을 연결하고, 연대하게 하는 기술에 집중하려 한다. 그건 문화적인 일이고, 정보통신 기술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IT와 콘텐츠, 커뮤니티를 같이 가져갈 계획이다.
위 프로젝트 소개 웹사이트에 들어가 스크롤을 내려 보면 내가 사람들을 연결하고 문화가 창발될 수 있도록 하는 과업에 짧지 않은 시간동안 관심을 가져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아직 이익을 견인하는 메인 제품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대체 뭘 만들겠다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건… 두달만 기다려 주시라. 곧 뭔가 나올 것 같다. 지금은 라이프스타일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운영하거나, 운영하려 하는 파트너들을 만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대장간 방명록
CFP는 Community First Projects의 줄임말이다. CFP의 ‘오퍼레이터’로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원칙으로 내 주변의 커뮤니티부터 좋게 만드려고 한다. 한편, 나한테 지금 가장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커뮤니티는 대장간이다. 대장간 커뮤니티를 발전시키기 위해 새 분기 대장에 지원했고 선출되었다.
대장간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했던 기존의 일을 총괄하는 일은 모두 부대장 상현이에게 위임하고, 나는 대장간 커뮤니티 멤버십에만 집중하고 있다. 현모가 그간 종이 책자에 기록되던 대장간 방명록을 웹사이트에 올려지는 걸로 바꾸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대장간 커뮤니티 멤버십과 관련이 크다 생각하여 그것부터 실행했다.
https://www.daejangang.xyz/ko#guestbook
대장간 방명록을 런칭한 뒤 벌써 몇몇의 친구들이 놀러 와 사진과 함께 남겨 주었다. 디스콰이엇 제품에서 영감을 받아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또, CFP의 핵심 가치인 ‘배제하지 않음/경계짓지 않음’에 따라 영어로도 방명록을 비롯한 웹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를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방명록을 작성할 때 자동 번역을 확인하고 수정하여 입력할 수 있게 했다.
바이브를 담아,
종한